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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다리연구소

그 시절 그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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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인터넷 지면에서 저에 관한 이야기가 일부 포함된 오렌지카운티 캘리포니아 동포신문의 발행인 칼럼을 뒤늦게 발견했습니다

읽고나니 거의 사반세기전 추억이 새록새록....

하여
뇌리의 저 밑바닥 깊숙히 침잠해 있던 오래된 기억의 편린 몇조각을 건져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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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90년대 초
호랭이 담배먹던 시절 이야기다

첨 미국와서 먹고는 살아야겠고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남가주에서 교포신문사를 하나 창간했다
서울 그리고 영국런던에서의 경험을 살려서...

이어 병행하여 WCC커뮤니케이션스라는
광고기획사도 설립

아참, 형사였던 나의 절친, 당시 현직(SAPD 바이스스쿼드-매춘풍속?전담반)에 있던 한인2세 넥이란 친구와
그리고 나중에 LAPD 갱유닛근무 중
갱단차량에 받혀 무릎부상 일찍 퇴직한
탐이란 백인친구도 끌어 들여
셋이 의기투합
PI 및 경비경호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이건뭐 구멍가게 수준 비지니스들
문어발식 확장도 아니고...하여간 혈기가 넘치던
30대 초반이었으니...

하여간 PI-프라이빗 인베스티게이션과 시큐리티서비스 사업은 경찰서를 등에 업고, 전도유망하다 판단
후리웨이 I-5근처 산타페스프링스에 널찍한 웨어하우스/오피스를 얻었다. 전현직 경찰, 군발이 출신 직원들을 대거 고용했고. 우리 공동투자파트너 세명 외에 풀타임 직원은 두명뿐이었으나 필드요원과 시큐리티가드 총잡이로 파트타임 사오십명의 인력을 돌림.

하지만 안그래도 CID 군수사관 출신 백인여자 매니저 S가 맘에 안들어 스트레스 받던 중 황당한 일이 터졌다
피닉스 아리조나 소재 인텔사 공장 컴퓨터칩 이송 컨테이너트럭의 반복적인 화물박스 증발사건를 의뢰받아 운송구간 미행감시 업무 중 fbi 나코틱스 즉 마약반에 포위 당해 백주대낮에 벌집이 될 뻔한 사건이 터진거다
사연인 즉슨 피닉스공장-롱비치항구간 트럭드라이버 감시/미행을 위해 반복적으로 렌트카를 빌렸는데
평소 수상해 하던 중 넥과 탐의 허리춤/발목에 콘실드 권총을 보고 마약운반갱단원으로 오해한 렌탈카직원이 경찰에 신고했던 것.
우리편에서는 손들어 하는 순간 거꾸로 언더커버 단속요원들을 절도범들이라 생각, 만약 같이 총을 뽑았으면....? ㅎ ㄷ ㄷ

다행히 체포직후 서로 오해였음이 밝혀져 exchange of fire라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지만 이 헤프닝은 다음날 일간 OC레지스터지에까지 보도되었다
그 무렵 바디가드 의뢰로 파견보낸 요원이 여성고객 성희롱으로 회사가 고소당하질 않나...크고 작은 총기관련 사고도 잊을 만하면 한번씩 터졌다
이거야 친구따라 재미?반 부업삼아 투자한 사이드라인 사업인데 갈수록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아직 애들도 어린데...
결국 나는 빠지기로 했다

와중에 타운뉴스는 초창기 올드타이머들의 시기질투? 유럽서온 반체제간첩썰등 우여곡절...난관을 극복하고 창간 6개월에 브레이크이븐 포인트를 넘기며 직원 20여명에 재정적으로도 나날이 번창, 매달 경비제하고도 상당한 수입이 발생, 어느새 절세를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할 정도가 되었다

고발취재로 유명했던 중앙일보 P기자를 편집장으로 스카웃 채용했는데 어느날 퇴근후 징기스칸집에서 샤부샤부를 건져먹다 말고 뚱딴지 같은 제의를 한다.
사장님 회사를 저에게 매도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마침 예의 방랑끼가 살살 도지던 참이었다 영원한 자유인을 외치며 호방하게 고국을 등진 내가 아닌가, 와이셔츠에 새끼줄이나 목에 메고 주판알 두드리며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도시생활에의 염증이 스멀스멀 목구멍까지 기어오르고 있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로 정리에 들어갔고 전격인수인계가 이뤄졌다

그로부터 10년 후 P기자에게 다시 이 비지니스를 인수한 분이 바로 아래 글을 쓰신 현재 발행인 시메이커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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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횡설수설이 되네요...마는
작년 일, 근래 만난 사람은 기억이 잘 안나는데
근 30년전 일, 이름들이 비교적 선명히 떠오르니
신기....하면서 불안합니다..치매가 그렇다는데...ㅎㅎ

유럽에서 사년반을 보내고 대서양건너 뉴욕
다시 남가주로 너머와 산건 불과 사오년 남짓.
하지만 질풍노도 30세 전후, 아직 ***에 피도 안마른
어린시절이라 벼라별 일도 많았던 천방지축의 시기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후 미드웨스트의 백인사회로 활동무대를 옮긴 후 18년의 세월은 애들이나 키우며 하품나게 심심했던 안빈낙도기라 할 수도 있을 듯. 물론 가끔은 치열했지만.
이제 그 미드웨스트 스토리도 기억 저편으로 아스라하게 침잠해 갑니다.

돌아보면 제 인생의 메인 이벤트는 아무래도 도미 전 유럽에서 시작한 캐러버닝, 그리고 잠시(23년...ㅎㅎ)넥타이 부대 복귀 쉬었다가
2014년 가산정리 출가하며 재개, 이후 현재진행형인 길바닥 노숙방랑-좀 폼나게 말해 자원고행-의 시기라 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뇌세포가 더 굳기 전에 조만간 로변철의 부끄러운 이야기-30년 이민소사를 어딘가에 한번 정리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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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이하 안창해 사장님, 일명 시메이커님의 관련 발행인 칼럼을 오려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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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본사 사옥 이전에 부쳐
06/29/20

“회사 형편이 어려워 부득이 당신을 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함께 일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니던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했다. 내가 원하던 퇴직이 아니었기에 유쾌할 리 없었다. 그래도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지친 마음도 달랠 겸 마침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여행을 떠났다. 2004년 6월에 있었던 일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나의 퇴직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 그리고 그해 9월, 한 회사에 몸을 담았다. 새 일을 시작한지 불과 13일 만에 ‘타운뉴스’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망설이지 않았다. 요구한 금액에서 한 푼도 깎지 않고 ‘타운뉴스’를 인수했다. 많은 돈이 모자랐으나 내 형편을 잘 알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생이 도움을 주어 가능했던 일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15년 9개월을 ‘타운뉴스’와 함께하고 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 사이 자녀 둘이 혼인을 했고, 그들로부터 다섯 명의 손주들이 생겼다. 또 초등학교 다니던 두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다. 그동안 미국은 조지 부시(2001-2009), 버락 오바마(2009-2017), 도날드 트럼프(2017-현재)까지 정권의 변화가 있었고 한국도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를 거쳐 문재인 정권으로 이어졌다. 내외적으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타운뉴스’도 예외는 아니다. 국가가 국민들의 뜻에 의해 정권의 변화를 가져왔듯, 타운뉴스의 변화는 대부분 독자들의 사랑과 응원으로 비롯됐다. 배포하기 위해 실외에 놓아둔 업소록이 물에 젖고 있다고 연락해 주신 독자, 신문이 발행되는 월요일 아침인데 벌써 가판대에 신문이 없다고 알려주신 독자, 해마다 시무식에 정성스레 시루떡을 해갖고 찾아와 한 해의 첫 업무를 함께해 주시는 독자, 기사를 제보해 주시는 독자 또, 기사 내용 가운데 오류를 지적해 주시는 독자, 오탈자를 알려주시는 독자까지, 어느 한 분이라도 ‘타운뉴스’의 주인이 아닌 분이 없었다
그런 독자들이 있었기에 ‘타운뉴스’ 직원들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단 한 주도 빠지지 않고 ‘타운뉴스’를 발행해 올 수 있었다. 물론 내부적으로 어려움도 많았다. 마감시간에 임박해 폭풍으로 정전이 발생해 전기가 들어오는 지역으로 컴퓨터를 옮겨 편집 작업을 마치고 무사히 ‘타운뉴스’를 발간했던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초조함과 아슬아슬함이 다시 밀려온다. 이처럼 많은 변화와 발전은 가든그로브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타운뉴스’는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해 산타페스프링스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타운뉴스’ 이전 소식을 듣고 ‘타운뉴스’ 창업자 제이 장이 연락을 해 왔다. 현재 그는 “부인과 함께 6년째 미 전역을 여행하며 그때그때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에서 즐기며 살고 있다.”며 그가 일주일 동안 머물 예정인 숲속 오두막으로 초대했다. 기꺼이 그의 초대에 응했다. 1박 2일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누며 그가 어떤 마음으로 ‘타운뉴스’를 창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창간 정신은 ‘프론티어십’이었다, 미국의 정신이기도 한 개척자 정신.
그는 미국 이주 전 영국 런던에서 한인 주간 신문사를 창업한 적이 있으며 미국으로 건너와 개척자 정신을 앞세워 ‘타운뉴스’를 창업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타운뉴스’를 운영하던 당시나 지금이나 ‘프론티어십’은 자신의 철학이고 ‘프론티어십’이 바탕이 된 ‘자유’가 자신의 삶이라면서 일주인 후면 어디에 있을지 자신도 알 수 없다며 웃었다.
그의 말을 듣다가 그의 창업정신이나 현재 ‘타운뉴스’의 정신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에 조금은 놀랐다. 사실 목표를 정해 도전하고 성취하며 그를 통해 사람들과는 함께 나누고 내 삶은 궁극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누구나 추구하는 가치이자 이상이 아닐 수 없다. 기업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도 개인의 자유와 더불어 나눔의 실천으로 귀결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가치는 한인사회와 더불어 성장해온 ‘타운뉴스’가 앞으로도 한인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래서 한시도 자만하고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가든그로브 시절, 2층에 있는 ‘타운뉴스’로 출근하려면 아래층에 있는 ‘명한의원’ 앞을 지나쳐야 했다. 그럴 때마다 ‘명한의원’에서 풍겨오는 한약 냄새가 참 좋았다. 분명 바로 그 한약 냄새가 그리울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산타페스프링스에서 펼쳐갈 앞날이 더욱 기대가 되는 것은 ‘타운뉴스’를 사랑해주시는 독자들이 여전히 함께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들에게 ‘타운뉴스’는 앞으로도 건전하고 유익한 정보들로 가득 찬 ‘밝고 명랑한 신문’으로서 그 사명을 다할 것을 굳게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