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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춘추

내가 버린 아기( 끌올/런던의 추억 )

그러니까 어느새 거의 사반세기 전의 일입니다.  그땐 정말 호랭이가 담배먹던 때지요.   


당시 무늬만 영국유학생의 떠돌이, 방랑히피hippie였던 지금의 태평양다리연구소장 로변철(필명)

그때도 캠핑카--당시 영국사람들은 토캐라반이라 낭만적으로 부르더군요--를 타고 

그대와 더불어 유럽을 종횡으로 누비던 중이었습니다. 


▣ 스위스 알프스-융프라우의 로변철과 그대. 아직 딸네미가 태어나기 전. 


그러다 잠시 막간을 이용해 그대와 사이에 생산한 갓난아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오랜 여정을 일시 멈추고 영국의 런던, 웨스트일링 일본인타운 부근에 예쁜 단독주택을 하나 얻어 정착했을땝니다. 하지만 한창 잘 자라는 아기가 세살도 채 안되었을 무렵 예의 못말리는 방랑끼가 다시 도졌습니다. 

이번에는 대서양너머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라~는 거부할 수 없는 그분, 역마살의 명령이었습니다.  


근데 이미 질러논 아기는 우야꼬?  


무책임하게도 영국동포사회에 아기의 양육을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뒤도 안돌아보고 런던발 뉴욕행의 

아이슬랜딕 에어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후 런던에서 난 아기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날. 

아빠 로변철은 대서양 건너에서 날아온 이메일 한통을 받게 됩니다. 


그때 버리고 온 아기가 지금 청년으로 예쁘고 건강하게 잘 자랐으니 

생부모(founder)로서 생일축하 한말씀 해달라는....

그래서 써 보냈었던 글이 아래 끌어 올린 "런던의 추억"입니다. 

2003년도에 쓴 글이지요. 당시 이글로 인해 연락이 끊어졌던 옥경이네 등 많은 분들에게서 반갑다는 메일을 받았었던 아스라한 기억이 있습니다. 


근데 최근 다른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인터넷 바다에  여전히 떠다니는 그때 내가 쓴 글을 보았습니다. 

어쩐지 낯이 익어 보니 어랍쇼, 바로 내가 그때 쓴 글.....  


로변철과 그대의 80-90년대초 유럽 캬러반caravan 방랑비사. 


그 한 구비의 애환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한편의 글이었기에 잽싸게 건져 올렸습니다. 

이제 이곳 태평양다리연구소 창고 한구석에 영구소장합니다.      



                          런던의 추억 



세속의 굴레와 허욕이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질풍노도의 끓는 피는 분출구를 찾아 터질 듯 용솟았다. 한계점이었다. 80년대 말의 어느 겨울, 난 며칠째 동경의 어느 다다미 여관방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다가올 내 인생을 저울질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했다. 그간 내 삶을 얽어 매고 있던 아무 짝에 쓸데없고 거추장스런 굴레들을 단 한 방에 날려 버리기로. 위험한 음모였다. 그러나 무서울 것 없는 이십대 청춘 아닌가.


며칠 후 우린 런던 행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새처럼 훨훨 나는 꿈을 꾸면서.
두번째 찾은 런던. 여행지가 아닌 이제부턴 여기가 내 고향이란 생각이었다.

뼈속으로 스미는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사우스켄싱턴의 싸구려 호스텔에서 고향의 첫 밤을 지냈다.  그리고 소호와 시티의 영국전통식당과 기무라상이란 일본인이 경영하는 가라오케바에서 색다른 밑바닥 인생도 잠시 체험했다. 그때만 해도 고생이라기보다 그 모든 것이 재미로 느껴졌다. 금요일 저녁이면 유명한 펍을 차례로 순례하며 고주망태가 되고, 주말이면 친구들과 피카딜리 서커스 계단에 앉아 각국 처녀들의 엉덩이를 관찰하며 비평하던 일. 한번은 클라스메이트였던 어느 이탈리안 여학생의 예의상 한번 놀러 오라는 말에 후일 진짜로 알프스 산속마을 그녀 가족의 집을 찾아가 놀래주고 중세의 고성 같은 그 집에서 며칠 묵고 온 일 같은 것이 지금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후 미국에서 온 어느 히피 커플에게서 산 폭스바겐 캠퍼밴을 타고 집시풍으로 대륙을 헤맸다. 


90년대초 노잣돈 마련을 위해 유럽 여행기를 출판하기도 했고 트럭마운트형 캐러반을 구입해 아예 여행사를 차릴 뻔 하기도 했다.  


런던북부 스탠모어에 단독주택을 얻어 살 때는 그레이트덴 종의 황소만한 애견 부루노를 기르며 연출한 온갖 코미디들도 생각나는 추억거리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역경과 고민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십수년이 흐른 지금 런던 초창기와 관련된 기억들은 고생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아름다운 영화 한편,  정겨운 장미빛 추억으로 주로 느껴질 뿐이니 이상하다. 그건 아마도 그때 음습하고 깊은 우물에서 밝은 벌판으로 튀어 나온 듯 숨가쁘게 좋았던 그 젊은 자유의 짜릿함이 너무도 강렬했었기 때문이리라.  이방인으로서의 설레임과 젊음의 도전욕구가 런던 체류 내내 우리의 근저를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 중에서도 역시 우리에게 가장 크고 보람된 일이라면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무자식상팔자주의를 고수하려던 내가 아내의 간구(나중에는 강압)에 굴복, 합방 7년만에 첫 딸 브리타니를 낳은 일.  또 하나는 영국 아니 아마도 유럽 최초의 한글 주간 신문일 <코리안위클리>를  창간해 발행한 일이다. 

<코리안위클리>의 탄생은 다분히 감상적이고 즉흥적 결심의 산물이었다. 친지의 이사짐 접시 사이에 꾸겨 넣어져온 한국신문을 펴서 맛있게 읽고 또 읽었다는 어느 교포 아저씨의 말이 문득 전기 자극처럼 뇌리를 파고 들었던 것이다. 그 스파크가 글쟁이 전력과 끼에 발동을 걸었다. 노쓰하로우 월셋방 한켠에 작업실을 차리고 우여곡절의 산고를 거친 끝에 91년 초여름 마침내 아기가 태어 났다.  <코리안위클리> 

사실 신문이라 호하기엔 좀 낯간지러울 정도로 인쇄나 외형은 보잘 것 없었다. 인터넷이고 뭐고 없던 시대였고 모든게 요령 부족.  장비라야 당시 런던대 박사과정이던 김종용 형(현 금감원 국장)이 연구실서 쓰다가 버리다시피 준, 타자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석기시대 컴퓨터 한두대가 전부였으니까. 


밤새워 직접 취재하고 쓰고 사진 찍고… 마감날이면 밤을 하얗게 새며 참으로 열심히 만들었던 기억이다. '도배'란게 뭔지도 모를때라 순진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맨땅에 헤딩 식으로 직접 취재하고 쓰고 디자인해 만들었다. 만화까지 배워가며 직접 연재했다. 다음날 동네 마음씨 좋은 아지라는 인도인이 하던 인쇄공장에서 찍어 스즈끼 깡통 찝에 싣고 템즈강을 넘나들며 런던시내 한인업소들에 돌리고 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기만 하다.

그런데 어랍쇼, 전혀 없다가 처음 그런게 나와선지 <코리안위클리>를 받아든 영국동포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고국소식에 늘 굶주려 있었으니 당연했다. 업소광고가 넘쳐나 지면을 곧 늘려야 했고 주재상사들로부터도 굵직한 광고협찬을 받기 시작했다. 때로 사사로운 마찰도 있었지만 주영대사관, 한인단체, 종교단체들에서도 여러모로 힘이 되어 주었다. 

그 중에도 잊을 수 없는 두분이 있다. 사사껀껀 본국정권을 갈구는 교포언론 특유의 삐딱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재임 중 음양으로 많은 지원을 해 주셨던 이홍구 대사(후일 국무총리 역임)가 그 중 한분이다.  이 대사는 캔싱턴왕궁이 내려다보이는 외교관 전용 레스토랑에 우리부부를 초대해 주기도 하셨다.  또 한분은 삼십년 넘게 런던교외에서 사시던 올드타이머 P옹이다. 60년대 한국의 일간지 논설위원, 영국특파원을 역임하셨던 분인데 BBC기자 출신의 영국인 여기자와 눈이 맞아 런던에 눌러 앉은 입지전적인 분이다. 드라마보다 더한 순애보였다. 한때 <런던시보>란 격월간지를 내신 일도 있는 P선생님은 매주 <코리안위클리>에 ‘청석정’이란 고정 칼럼을 써 주셨다. 


▣ 90년대 초반, 방랑 히피hippie 에서 야피yuppie로 변신, 잠시 넥타이부대에 합류했던 로변철. 

교민언론 발행자로 주영대사와 인터뷰 중.


하여간 취미 반 시작한 일이 생각외로 광고수입도 짭짤해 곧 사무실도 근사하게 차리고 직원들도 여럿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나중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프랑스 빠리까지 배포했다. 삼성전자, 현대, 대우, 동아건설, 대한항공 등의 유럽지사에서 광고/구독료 명목으로 점차 고정협찬을 받기 시작하면서 연말에 소득세를 어떻게 내나 행복한 고민을 할  정도로 재정이 좋아졌다. 나중에는 공연히 시기 질투하는 이들, 출처불명의 이런저런 괴소문(간첩설)도 떠돌았다니 그 역시 인기의 반증이었다. 체류를 위한 신분문제도 자동해결돼고 아기도 태어나자 영국시민으로 그냥 런던에 눌러 앉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인사회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게으른 천성에도 불구하고 한 호도 안 거르고 3년 가까이 발행을 이어갔다. 물론 나와 달리 시간관념 철저하고 책임감 강한 집사람 도움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선천성 방랑끼의 주기적 발동인가? 런던생활에 자리와 틀이 잡혀 갈수록 어쩐지 내면에서는 그 반비례로 일상의 권태가 다시금 서서히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새처럼 훨훨 날자던 우리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 새끼줄이나 목에 메고...


모처럼 서울 방문 후 어느날 문득, 나는 더 큰 세상을 넘보며 수평선 너머로 자꾸만 날아가려는 스스로를 결국 억제하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어쩐지 여기보다 저 너머 잔디가 더 푸르러 보이는 건 그저 착시현상일  뿐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93년 여름, 우리 세식구는 정든 런던을 등지고 대서양을 건넜다. 이제 끝없는 디아스포라의 여정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무대를 옮겨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 그간 동부 뉴욕 맨하튼에 그리고  웨스트코스트의 남가주 오렌지카운티에 4년 가까이 살며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 이미 추억 속에 파묻었다. 이제는 다시 미드웨스트 지방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어느새 6년째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작년 어느날, 우린 한동안 소식을 모르던 자식의 소식을 듣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에서 힘들게 낳아 기르다 미국에 오며 할 수 없이 남에게 주고 온 아이가 건강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자랐다는 소식이었다. 이름도 태어날 때 지어준 그대로 <코리안위클리>였다.

그간 맡아서 십년세월 훌륭하게 키워 오신 분과도 연락이 닿았다.  이번 지령 600호 발간과 관련한 원고부탁을 받고 축하인사를 신세타령 비슷한, 두서 없는 이 글로 대체한다. 


아무쪼록 유럽 최초의 한글신문 <코리안위클리>의 롱런을 기원합니다.


▲ “오랜만입니다.” 초대발행인 장제이씨 가족은 사진과 함께 독자 여러분의 안부를 전해왔다.  “이 기회에 저희 부부를 기억하는 분들께 십년 만에 안부 전하며 그리운 여러 분들로부터 소식 기대합니다”라며 이메일주소를 알려왔다. happybusday@gmail.com